호주 워킹홀리데이 <제목 없음> D+279

1. 젠장할 자동차

젠장할 자동차. 젠장할 자동차. 젠장할 자동차. 아, 이렇게 쓰고나니 조금 속이 시원하다. 젠장할 자동차.

3개월 전 너무 값싼 자동차를 산 게 문제였다. 뭐, 그때 당시에는 돈이 없었으니 이렇다할 선택지가 없었지만 이정도로 속을 썩일 줄이야.

어제 일 나갈 준비를 하다가 맞은편 캠프 사이트에서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를 두고 씨름하던 같은 팜 워커들을 봤다. 프랑스와 아일랜드에서 온 커플이었는데 배터리가 나갔는지 시동이 안 걸린단다. 나는 내 차 주제를 모르고 괜찮으면 같이 출근하자고 했다.

출근 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터졌다. 도버에서 메카닉이 말하길, 라디에이터 캡을 한 칸만 닫으라 했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전 날 두 칸을 모두 닫고 달렸다. 결국, 실리콘으로 임시 땜질을 한 호스가 터졌고 엔진 과열로 중간에 멈춰서야 했다

다행인 건, 캠핑장 도착 1분 전이었고 어느 집 앞에서 유턴을 하려고 갓길에 멈춰섰다는 점. 몇 분 한 숨 쉬며 허리 춤에 손을 얹고 있자니 집 주인인 듯한 한 아저씨가 나와서 'How are you doing?'하고 묻는다. 'Not good.' 하니 웃으며 다가온다. 아저씨는 차에 대해 잘 아는 듯 했고,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줬다. 아저씨 집에서 물을 떠다가 임시로 보충 하고, 빌빌 거리는 자동차를 끌고 간신히 캠핑장으로 돌아왔다.

혼자였으면 좀 덜했을텐데, 괜히 내 차 타고 가지 않겠냐고 물었던 톰과 에일리?(이름을 까먹었다)에게 미안했다.

참, 아저씨 이름은 데이비드였고 백패커 같아 보이는 우리에게 어느 사과 농장을 추천해 줬다. 인터넷 검색해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농장인 거 같았는데, 지역 주민의 추천이니 한 번 들려봐야겠다.



2. 체리 농장 이틀 차

오늘은 18러그를 만들었다. 사실, 체리 농장에서 일하면 돈을 생각하지 않기가 어렵다. 나는 많은 돈을 바라지는 않고, 그저 내 노동의 대가인 호주 법정 시급을 맞추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면, 하는 김에 바짝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는 것도 좋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체리를 천천히 딴다고 해서 내가 무슨 낭만과 로맨스를 그곳에서 즐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 속에서 같이 열심히 일하려 생각하고 있다.

함께 일하는 한 워커가 체리를 따면서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노래를 틀어 놓고, '설교'를 한다.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 입니다. ...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천국에 가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하는 식의 이야기들. 뭐, 그 사람의 믿음에 왈가왈부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만, 재밌는 건 체리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따시면서 '돈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아무렴, 뭐 어떠랴. 그는 행복해 보이는 것을. 누구라도 편견과 자기 확신의 함정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거 아니던가.



3. 오랜만의 아침 산책

오늘 새벽, 차를 끌고 휴온빌로 왔다. 카센터가 문 여는 시각은 8시. 나는 6시가 되기도 전에 휴온빌의 어느 주차장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 때에 나왔다간 내 차 뒤로 밀려드는 차에게 도저히 길을 내주면서 휴온빌까지 올 수 없을 거 같아서 일찍 출발했다.

짐들이 어질러진 차 안을 조금 정리하고,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갔다. 넉달 전, 휴온빌에서 차 없이 살 때 이곳저곳 걸어다녔었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전에 자주 갔던 어느 동산에 올랐다. 나는 이 동산이 좋다. 지나치게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온 몸에 힘이 들어가고 숨이 가빠지는 데 그게 너무 좋다.

동산에 올라 생각했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사일 째, 샤워도 못하고 거지처럼 살아가는 내 신세가 처량했다. 공장에서 몇 개월을 일하면서 그래도 앞으로 서 너달은 일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돈을 충분히 모았음에도 나는 왜 한 푼 두 푼 아끼려 하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자본이 약속하는 미래, 그것에 한 번 내 자신을 맡기고 난 뒤로 나는 그것이 선사할 기약 없는, 그러나 언제고 그 기약을 지금으로 만들 수 있는 자본의 부드럽고 강한 힘에 굴복한 또 한 명의 '자본 도취자'가 된 걸까.

돈은 매력적이다. 돈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다. 그러나, 3년 전 영국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며 느낀 건, 내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돈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이었다. 나는 돈이 아닌, 만족을 원하고, 돈이 아닌, 기쁨을 원하고, 돈이 아닌,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만족과 기쁨과 사랑은 모두 돈이었다. 그 사실이 암울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부정하며 살아갈만한 배짱은 나한테 없었다. 자고로 배짱은, 적어도 허기지지 않은 배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처음 워킹 홀리데이를 떠날 땐 많이 기대했다. 당시엔 영어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동경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동경이었고, 보다 정확하게는 미디어로부터 주입된 동경이었다. 근 2년 간, 이들의 삶을 보고 난 지금, 배울점도 많지만 또 배우고 싶지 않은 점도 많다.

한국으로 슬슬 돌아갈 때가 온 건가 싶다. 혹은, 생각을 정리할 조금 긴 여행이 필요한 것일지도.

차가 잘 수리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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